컨-템퍼러리 예술 이후?: 이브 eve, 혹은 ‘동-시대적 픽션’


곽영빈


1. 이브와 컨-템퍼러리


전시 리플렛 첫 페이지에서 출발해보자. 거기서 ‘이브 eve’, 즉 이 전시의 제목은 “특정 사건 이전에 존재하는 이름 없는 시간”으로 기술된다. ‘크리스마스이브’라는 표현이 대표적으로 웅변하듯, 원래 13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이 단어는 주로 각종 기독교 성인들의 기일이나 축제 전날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즉 ‘이브’란 독립적이라기보다는 의존적인 시간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 전시에 부재한 것은 “특정 사건”인 것이다.

하지만 이를 말 그대로 성스럽고 특별했던 “사건”이 사라졌다고만 보는 것은 다소 시대착오적인 판단일 것이다. 핸드폰 설정을 꺼둬야 할 정도로 범람하는 SNS 알림창과 일상화된 ‘속보’들이 웅변하듯, 우리의, 당대의 문제는 ‘사건’의 부재가 아니라 ‘편재ubiquity’에 가깝기 때문이다. 11월 초부터 온갖 매장에서 울려 퍼지는 ‘캐럴송’들을 통해, 실질적으로 크리스마스이브가 거의 두 달간 이어질 때 ‘크리스마스’란, 혹은 ‘이브’란 무엇일까? 수많은 ‘사건’들이 (겨우) ‘템퍼러리 temporary’한 것으로 명멸하고, 그들이 서로, ‘함께(con-)’ 모여도- ’당대적 contemporary'인 것이 아니라- 여전히 ‘일시적 temporary’인 것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할 때, 즉 ‘이브’라는 시간을 규정했던 ‘종속성’이 이러한 단속적인 사건들의- 결핍이 아니라- ‘과잉’을 통해 제거될 때 ‘이브’란, ‘사건’이란, 과연 무엇일 수 있을까? 그때, 다시 말해 오늘날, ‘작업 work’이란 도대체 무엇으로 ‘작동 work’하는 것일까? 이런 시점에서 전시를 되돌아보면, 전시장 1층에서 3층까지 배치된, 얼핏 따로 노는 작업들이 기이한 연쇄 속에서 이합집산 중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정희민의 그림에서 시작해보자. 그의 신작들은 2016년 <어제의 파랑>(사루비아 다방) 전시나, 올 초의 <2018 금호 영아티스트>(금호미술관) 전시의 연장선상에서 디지털 이미지와 아날로그 이미지 간의 중첩과 엇갈림을 직조한다. 올 초 한 미술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작가는 자신이 “‘방금 내린 눈처럼 하얀 식탁보’, ‘수북이 얹힌 빵’을 어떤 뉘앙스로 그려도” 관객은 그것을 알아챌 수 없을 것이라고 쓴 적이 있는데,1 자신의 그림을 “뜯어볼 곳이 없는 그림, 발길을 붙잡지 않는 그림, 부질이 없는 그림, 감정이 없는 그림, 표현이 없는 그림, 해석이 없는 그림, 그림일 이유가 없는 그림”이라고 묘사하면서, 그는 자신이 “공포를 향해, 기계가 되어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렇다고 여기서 스스로를 기계에 비유했던 워홀을 떠올리거나, 디지털 이미지를 “기계”적이고 ‘차가운’ 것과 등치시키려는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작업은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목에 전경화 된 하트의 이미지가 화면 전면을 뒤덮는 (2018)에서 ‘사랑을 제외한 모든 걸 지우’라는 명령은, 우리가 거의 매일 누르고 지우는, 혹은 그 사이에서 주저하는 SNS의 버튼(‘마음에 들어요’) 아이콘을 환기하는데, 이 명령을 그대로, 즉 “기계”적으로 따를 때- 다시 말해 마음에 드는 트윗들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지울 때- 해당 유저의 타임라인은 아무런 활동이 없는, 정지된 것처럼 보이게 된다. 즉 디지털 세계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시각성의 축소와 제거에 기여하는 명령이, 아날로그 세계에서는 시각성의 현현에 기여하고 있는것인데, ‘AI’와 ‘레트로’ 사이에서 진동하는 당대의 중핵에 놓인 이러한 시/공간적 ‘엇갈림’의 메커니즘야말로, 서로 다른 시간성들이 함께 하(지 않)는 것으로서의 ‘컨-템퍼러리’를 오롯이 드러내 준다. 디지털 이미지를 아날로그 이미지로, 혹은 그 반대로 번역, 혹은 변형시킨다는 미명 하에 정작 양자의 근거를 건드리지는 못하는 수많은 시도들의 지루한 공회전 속에서, ‘회화라는 얼룩’이 만드는 이 미묘한 간극은 더욱 선명해 보인다.



2 ‘형상과 배경’이라는 구분의 내파


사실 그간 정희민이 수행해온 작업들, 특히 <어제의 파랑>전에서 전면화 됐던 일련의 레이어 그림들은 프로이트가 ‘신기한 글쓰기 판(Wunderblock)’이라 불렀던 투박한 양초 판 표면에 남은, 희미하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는 자취들을 떠올려준다. 디지털 알고리듬에 내재하는 ‘버그’의 산물이자, ‘오작동’에 가까운 이 ‘글리치(glitch)’적 자국들은, 일련의 항아리들과 깨진 조각들이- ‘표면 vs. 이면’이라는 전통적 이항대립과 무관하게- 같은 평면 위에 공존하는 (2018)에서는 태연하게 아날로그적 형상으로 서 있다.  앞에서 살펴본 와 함께 이 작업은 미술사의 근원적 필터 중 하나인 ‘형상과 배경(figure and ground)’
의 위계적 이분법을 유예시키는데, 김혜미와 황효덕, 그리고 함혜경은 각각 다른 방점을 찍으면서 이를 더 밀고 나아간다.

제발트나 볼라뇨 같은 작가들에 대한 숨길 수 없는 매혹이 웅변하듯이, 김혜미는 그간 인간과 역사, 주연과 조연이라는 위계를 일거에 풍화시켜버리거나, 역으로 허구적인 것에 놀랄만한 실체성을 부여하는 시간의 힘에 대한 인식 속에서 작업해 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반복되는 판형과 인쇄 과정 속에서 형상과 배경의 구분이 점진적으로 무화되는 일련의 석판화 프린트 작업(예: , 2016)이나, 얕은 풀밭을 걸어 생긴 희미한 길(의 흔적)을 사진으로 찍고 이를 “조각”이라 불렀던 리처드 롱(Richard Long)을 염두에 둔 퍼포먼스, 또는 <피난처는 잔해와 같은 소리를 낸다 Abri sounds like Debris>(2017)처럼, 쉼터에서 무덤을 보고, 배에서 노아의 방주라는 인류절멸의 위기를 읽어내는 형식으로 변주되어 왔다. 이번 전시의 신작 (2018)은 이러한 가속(acceleration)의 감각을 급진화해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까지 압축(compress)하는- 다소 아슬아슬한- 작업으로서, 작가는 ‘브뤼헤의 침실’이란 뜻의 네덜란드어 표현(‘Bruges, Slaapkamer’)을 ‘보르헤스, 잠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거의 망상에 가깝게 오역했던 경험을 11개에 이르는 다양한 매체로 분화시킨 뒤, 이를 다시 같은 크기의 11개 좌식 테이블로 변형시켜 2층 바닥에 아무렇게나 펼쳐 놓았다.     

이쯤 되면, 지금 좌식 테이블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의 ‘전생’이 무엇이었는가라는 문제는, 그에 대한 실증적 지식 못지않게 무의미해진다. 이런 의미에서 물과 불, 수증기와 얼음 사이를 오가는 다양한 상태들- 특히 그의 작업에 자의식적으로 출몰하는 ‘고드름’-의 변이에 주목하면서, 모든 “견고한 형상”들이란 “결국 언제고 허물어지고 수정될 수 있는 가설적 상태”라는 인식을 공유하는 황효덕 보다 좋은 짝패는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신작인 <달 표면 고래>(2018)는 얼핏 이전까지의 이러한 궤적과 무관해 보이기도 한다. 거의 형광에 가까운 분홍색 파우더의 둔덕, 상형문자나 신석기 시대의 유물처럼 보이는 짙은 초록색의 물체들,슬라이드 프로젝터를 통해 벽에 투사되는, 세포와 추상을 넘나드는 이미지들, 그리고 투명한 사각형 안에서 펌프로 작동되는 물줄기들은 서로 다른 질감과 형체, 색채와 작동방식으로 어색하게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사이의 존재론적 서먹함은, 김혜미의 좌식 상들이 그 동일한 겉모습을 통해 시사하는 친밀감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양자는 그저 공간적으로, 그리고 도상적으로 가까워 보일 뿐, 그 어떤 공동체나 단체를 형성하지 않는 것이다. ‘템퍼러리’한 것들의 모임이 ‘컨-템퍼러리’로 이어지지 않듯, 근접성(proximity)은 친밀함(intimacy)과 독립적이다.           

스스로를 “ 온전한   제작자가   아닌   발굴한   것을   보관하거나   중재하는   정도의   역할”로 간주하는 김혜미와, ‘정체성’이 “가설적 상태”과 거의 구분 불가능해진 황효덕의 작업은, 함혜경의 ‘오디오 비주얼’ 신작 <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2018)와도 내적으로 연동한다. 2003년이라는 다소 이른 시점부터 ‘파운드 푸티지’적이면서도 드문 의미에서 ‘픽션’의 위상을 재기 넘치게 포착했던 그의 작업은(예)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2003), 작가 자신의 표현대로 “논픽션을 픽션화”한다고 얘기될 수도 있고, ‘에세이 필름’과도 유사해 보이(고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얼마 전 다른 곳에서 임흥순 작가의 작업을 범례로 삼아 상세하게 제시했듯, 그의 작업은 내가 ‘페르/소나(per/sona)’라고 부른 미학적 형상을 둘러싸고 국내외의 여러 작가들이 지난 20여 년 간 수행해온 다양한 변주 중 하나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일관되게 제시한다  2(크리스 마커의 <태양 없이 Sans Soleil>(1983)로 대표되는 종류의 작업에 물줄기를 대는 또 다른 국내 작가들로는 양아치와 이주원이 있다).

단순히 말해 ‘페르/소나’란, 사운드와 이미지, 그리고 자막으로 통칭되는 문자 이미지 간의 괴리와 간극을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기원적인 것(original)으로 간주하는 태도와 관련되는데, 이를 함 작가는 폭로나 거리두기, 혹은 비판의 방식이 아니라 서사적 인물의 실연이나 죽음, 혹은 실종과 같은 친숙한 설정, 그리고 보이스 오버와 보이스 오프(voice-off)를 오가는 일인칭 내레이션의 청각적 장치를 통해 줄타기하면서 꾸준히 변주해왔다. 종종 오해되지만, 그의 작업이 제공하는 ‘소통’과 ‘공감’의 상대적 용이함은 이런 의미에서 섬세하게 기만적인데, 그것은 그 모든 이야기와 설정들이 추상적이라기보다는 상투적이고, 회사나 브랜드의 고유 명칭 없이 일반명으로 판매되는 상품이나 약을 지칭하는 형용사인 ‘generic’에 정확하게 부합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그의 작업에서 지극히 개인적이라거나 감정적 또는 지나치게 낭만적이라고 느끼는 지점들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고유한 개별성이 가장 희박하고, 더할 나위 없이 상투적인 것으로 밝혀지는 지점인 것이다 (<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 중간에 나오는, “풍경화는 경관이 황량한 지역에서 발달”한다는 화면 밖 화자의 (일본어) 대사는- 제목과 함께- 이를 정확하게 지칭한다).



3 진짜와 가짜를 넘어: ‘동-시대적 픽션’을 향해 


이런 맥락에서 함 작가와 앞에서 언급한 작가들은 소위 ‘이면’에 숨겨진, ‘진정한’ 자아나 정체성이 아니라, 중첩되고 무한히 주름 잡힌 것으로서의- 다른 곳에서 내가 ‘바닥없는 abyssal’ 것이라 규정한- 표면과 세계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는데, 이는 최윤과 최하늘이-그리고 그보다는 약간 다른 맥락과 함의를 가지고 조익정이- 각각의 궤적을 통해 천착해왔던 문제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최윤의 <진보2>(2018)는- 제목이 시사하듯- <진보>(2015)와 계열을 이루는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국민 매니페스토>와 함께 일종의 ‘매체 고고학’에 해당한다.

<진보>의 사운드 트랙은 작가가 여전히 많은 시간을 보내는 서울 지하철 안에서 매일 듣던 일련의 안내방송인데, 그에 상응하는 이미지들은- 실제 지하철 칸 안에서 볼 수 있는 현실의 풍광이 아니라- 벽에 걸린 액자 사진들에 박제된 풍경들의 투박한 연쇄일 뿐이다. 여기서 핵심은 그러한 풍경이 ‘가짜’라는 것이 아니라, 다음 역을 알려주는 안내방송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지하철의 전진운동이 이렇게 프레임에 우겨넣어진 이미지들을 연속적으로 나열하는 조악한 이미지 재생방식을 통해 확보하는 아이러니한 거리, 무엇보다 ‘장치(l'appareil/apparatus)’적인 차원이었다. <진보2>는 이를 일종의 낙서와 그래피티, 노래방 가사 사이 어딘가에서 부유하는 공허한 문장과 구호들(“꿈을 이루자”, “멋진”, “아름답다”)을 부제 그대로 풍경에 들러 붙이고, 작가 특유의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소리 변조를 통해 변주한 뒤, 그것이 놓인- 조각이라면- 좌대(pedestal)와 모니터 스크린 자체를 허름한 현수막 천으로 다시 접붙임으로써, 진정하고 순수한 ‘풍경’이란 없다는 것을, 모든 풍경은 이미 언제나 ‘오염’되어 있다는 점을 철저하게 강조한다(이 작품을 샌드위치로 포위하는 양 벽의 작품들 중 하나에는, 작동하지 않는 타이머와 방향제가 놓여있는데, 그 밑에는 ‘불로장생회춘법’이라는 문구가 마치 주문처럼-혹은 농담처럼- 촘촘하게 인쇄되어 있다).   

예전 다른 곳에서도 썼듯이, 최하늘의 작업은 종종 작가 자신의 생각이나 의도와 작업 사이의 간극이 흥미로운 결과를 만드는데, 이번 전시의 신작 역시 그러한 여지가 없지 않다. 작가가 근래 몰두 중인 K팝 음악과 아이돌은 여기서 360도로 회전하는 조각으로 형상화되었고, 이를 작가는 ‘평면’과 ‘두께’, ‘일면’과 ‘전면’, ‘가짜’와 ‘진짜’라는 이항대립의 연쇄 속에서 설명하는데, 이 작업의 위상은 지난 9월 시작해 11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 작업과, 지난 10월 7일 산수 문화에서 끝난 전시를 함께 염두에 두고 얘기할 필요가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의 3층 전시실 옆 한 부스를 통으로 부여받은 최하늘의 비엔날레 작업의 핵심은 그것이 가족 단위 방문객들, 특히 어린이를 위한 것이고, 따라서 누구든 만질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작가가 언제나 ‘가짜’의 지위를 부여하는 ‘표면’과 ‘일면’의 대척점에 서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반해 이번 전시의 신작과- 수저와 컵, 디저트 케익과 커피에 이르는 카페 물품 일체가 진짜처럼 배치되고, 엑소의 ‘아티피셜 러브’가 강박적으로 흘러나오던- 산수문화 전시는 ‘조각’도 ‘가짜’일 수 있다는 점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립은 정확한 기술과 거리가 멀다. 아이들에게 해가 되지 않을 가벼운 에폭시 등으로 만든 비엔날레 전시 조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이런 표현을 써도 된다면- ‘진짜 가짜를 진짜로 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성숙한 것은 성숙이라는 이상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고, ‘이브’를 여전히 ‘사건’에 종속적인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전시장 초입에 놓여 있는 조익정의 신작은 우리를 함혜경과 최윤의 문제설정 사이 어딘가로 되돌려 보낸다. 다양한 방식의 퍼포먼스와, 단순하면서도 독특한 무대장치를 통해 주목 받아온 조 작가의 신작 <아파트 뒷길>은 한 청년이 느끼는 갈등을 수묵 드로잉 시리즈로 그린 뒤, 일본의 거리 연극 형식인 카미시바이(Kamishibai 紙芝居), 즉 종이 그림 연극으로 보여준다. 드로잉들은 자전거 위에 설치된 작은 무대에서 보이고, 관객은 책상에 놓인 기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사운드를 통해 그 그림들 사이의 이행과 연쇄를 메꾸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작업의 스크립트는 군대를 제대한 남성의 그것이라는 점에서 작가 자신의경험과는 다르고, 가장 그럴듯해 보이거나 그럴듯하게 들리는 영화나 영상의 형식이아니라는 점에서 이중의 거리를 갖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픽션’은 작가자신이 십여 년 전 경험했던 정황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함혜경의 ‘친밀한허구’가 전해주는 역설적인 거리감으로 환원되지도 않으며, 동시에 카미시바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장치’를 통해 전적인 ‘친밀감’으로 전환되지도 않는다. 장치와 픽션, 그리고 친밀감 사이를 줄타기하는 조익정의 작업은 등장인물의 눈높이대로 철봉과 평행봉 등을 배치했던 그의 독특한 감각을 다시금 확인해줄 뿐만 아니라, 장치 안에서, 장치를 통해, 장치와 더불어 경험하고 감각하는 우리의 근과거를 감각적으로 채굴하는 최윤과의 미묘한 거리 또한 동시에 도드라지게 한다. 어쩌면 이들 사이 어딘가에, 이른바 ‘동-시대’적인 것이, 이브와 사건을 넘어, 혹은 그들 이전에 이미, ‘작동’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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