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rte
May 15, 2019 – June 30, 2019
Audio Visual Pavilion
Dawhan Ghim
GIM IKHYUN
Yang Ah Young
Chung Heemin
Cha Seungean
Curated by
Seewon Hyun


시청각은 2019년 5월 15일부터 6월 30일까지 «정물화전»을 연다. «정물화전»에는 김대환, 김익현, 양아영, 정희민, 차승언 작가가 참여한다. 시청각이 «정물화전»을 기획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1947년 지어진 반쪽 짜리 수박같은 전시 공간에 ‘멈춰진 사물’로서의 오늘의 정물화를 놓아 보고자 한다. 실내에 들어온 멈춰진 그림으로서의 정물은 숙고이자 숙련의 방편으로서 1920년대 이도영(1884-1933) 등에 의해 탐구되었다. 이도영은 실물을 그리는 사생화 지도에 필요한 ‹연필화임본›(1915)을 쓰기도 했다. 이도영의 ‹추당청공(秋堂淸供)› (1915)은 “기물들이 쏟아질 듯 표현되었던 과거의 그림들”과 달리 “각각의 기물이 서로 공간을 침해하지 않고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는 구도”를 보인다.1) 그렇다면 오늘날의 작가가 정물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밝혀내는 시도는 무엇으로써 가능할까? 여전히 정물화라고 불리는 그림은 존재하며 미술가들은 정물을 포획하거나 저장하고자 하기는 하는가? «정물화전»은 흩어진 파편과 같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뇌에 파고든 소멸 직전의 정물화의 ‘자리’를 질문한다. 다섯명의 작가들은 창과 문을 통해 들어왔다가 나가는 작품을 통해 ‘정물화로 부르기로 한 어떤 것’의 시점과 시제를 탐구한다.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의 ‹수박도›(1839)를 연구한 일본의 미술사학자 이마하시 리코는 싱싱한 칼이 꽃인 수박 그림을 하나의 전설로 읽는다.2) 여기서 수박보다 빛나는 것은 사선으로 뉘인 칼과 높은 줄에 걸린 두 가닥의 수박 껍질이다. 수박보다 오래 남을 고체 사물의 명징함은 그림의 수직성을 강화한다. 이어지는 독해는 수평적 평면에 도열된 수박씨다. 이마하시 리코는 이 수박씨의 도상적 독해를 통해 견우성과 직녀성 두 별을 둘러싼 사랑의 독해를 본다. 이어 ‹수박도›가 화조도가 아니라 은하수의 전설을 나타내는 ‘모노가타리(物語, 이야기 또는 전설)’임을 밝힌다. «정물화전»에 참여하는 다섯 명의 작가들과 ‹수박도›에 관한 논문을 함께 읽었다. 이들은 각자 다른 방향과 위치에서 자신의 연구를 지속하고 다르게 열어젖힌다.양아영은 “한 가지의 정물”을 그린 적이 없으며 항상 두 개 이상의 것들을 나열하고 배치하는 형식을 탐구해왔다. 이번 전시에서 “내면화된 정물화”의 형태를 바깥으로 꺼내본다. 김대환은 눈의 장난감이자 축소된 세계의 ‘보는 기술’인 옵 아트(Optical Art)에 대한 관심에서 파생하여, “애완동물이 쏙 들어왔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의 목-어깨선”과 같은 위치-시선-사이즈의 문제를 입체 구조물로 만들어낸다. 차승언은 정물을 “요리조리 뜯어보는” 정박의 감각으로 읽어내며 직물이 제작되는 데 필요한 “구조도”를 연구한다. 수직 수평의 프레임 안에 또 들어오는 프레임은 매듭 묶기와 풀기의 구조를 역재생시킨다. 오늘날의 프레임 하에 어떤 시야가 가능한가의 문제는 정희민의 작업에서도 흥미롭게 논의된다. 정희민은 오늘날 인터넷 환경에서의 정물을 실제 공간에 중첩시킴으로써 제한된 양감을 허락하는 이동 통로(문)에 반응하는 이미지를 설치한다. 이는 정희민이 집중적으로 탐구했던 문제이기도 하다. 김익현은 “사물이 본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일까”라는 근래의 질문에서 출발하여 “검은 유리”와 한국 현대사를, 그가 발견한 “바둑에 잠재된 기보와 복기”의 이중성을 그가 착안한 “사진술”로 저장한다.
시청각이 «정물화전»을 기획한 두 번째 이유는 몇 해 전부터 과일에 대한 프로젝트를 해보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인왕산 이미지에 대응하고자 했던 시청각의 첫 전시에 대한 반대 급부이자 어떤 항으로서 «정물화전»을 본다. 실내에서 그림(작품)을 본다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지, 앉아서 봐야 하나, 움직이면서 걸어가면서 봐야 하나, 눈으로 봐야 하나, 촬영해서 가져가서 봐야 하나. 질문은 여기서 자르기로 하자. 눈앞에 가져다 놓은 «정물화전»은 소멸되어가는 어떤 눈을 이야기한다. 그것을 우리는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잠시 뇌 속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1) 김예진, ‘이도영의 정물화 수용과 그 성격-사생과 내셔널리즘을 통한 새로운 회화 모색’, 미술사학연구 2017. 김예진은 주전자에 표현된 명암은 서양화법을 완전히 숙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실재감을 표현하려는 시도에서 나왔다고 분석한다.
2) 이마하시 리코, ‘전설의 기호-호쿠사이의 <수박도>와 칠석’. 미술사논단,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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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지어진 반쪽 짜리 수박같은 전시 공간에 ‘멈춰진 사물’로서의 오늘의 정물화를 놓아 보고자 한다. 실내에 들어온 멈춰진 그림으로서의 정물은 숙고이자 숙련의 방편으로서 1920년대 이도영(1884-1933) 등에 의해 탐구되었다. 이도영은 실물을 그리는 사생화 지도에 필요한 ‹연필화임본›(1915)을 쓰기도 했다. 이도영의 ‹추당청공(秋堂淸供)› (1915)은 “기물들이 쏟아질 듯 표현되었던 과거의 그림들”과 달리 “각각의 기물이 서로 공간을 침해하지 않고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는 구도”를 보인다.1) 그렇다면 오늘날의 작가가 정물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밝혀내는 시도는 무엇으로써 가능할까? 여전히 정물화라고 불리는 그림은 존재하며 미술가들은 정물을 포획하거나 저장하고자 하기는 하는가? «정물화전»은 흩어진 파편과 같이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뇌에 파고든 소멸 직전의 정물화의 ‘자리’를 질문한다. 다섯명의 작가들은 창과 문을 통해 들어왔다가 나가는 작품을 통해 ‘정물화로 부르기로 한 어떤 것’의 시점과 시제를 탐구한다.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의 ‹수박도›(1839)를 연구한 일본의 미술사학자 이마하시 리코는 싱싱한 칼이 꽃인 수박 그림을 하나의 전설로 읽는다.2) 여기서 수박보다 빛나는 것은 사선으로 뉘인 칼과 높은 줄에 걸린 두 가닥의 수박 껍질이다. 수박보다 오래 남을 고체 사물의 명징함은 그림의 수직성을 강화한다. 이어지는 독해는 수평적 평면에 도열된 수박씨다. 이마하시 리코는 이 수박씨의 도상적 독해를 통해 견우성과 직녀성 두 별을 둘러싼 사랑의 독해를 본다. 이어 ‹수박도›가 화조도가 아니라 은하수의 전설을 나타내는 ‘모노가타리(物語, 이야기 또는 전설)’임을 밝힌다. «정물화전»에 참여하는 다섯 명의 작가들과 ‹수박도›에 관한 논문을 함께 읽었다. 이들은 각자 다른 방향과 위치에서 자신의 연구를 지속하고 다르게 열어젖힌다.양아영은 “한 가지의 정물”을 그린 적이 없으며 항상 두 개 이상의 것들을 나열하고 배치하는 형식을 탐구해왔다. 이번 전시에서 “내면화된 정물화”의 형태를 바깥으로 꺼내본다. 김대환은 눈의 장난감이자 축소된 세계의 ‘보는 기술’인 옵 아트(Optical Art)에 대한 관심에서 파생하여, “애완동물이 쏙 들어왔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의 목-어깨선”과 같은 위치-시선-사이즈의 문제를 입체 구조물로 만들어낸다. 차승언은 정물을 “요리조리 뜯어보는” 정박의 감각으로 읽어내며 직물이 제작되는 데 필요한 “구조도”를 연구한다. 수직 수평의 프레임 안에 또 들어오는 프레임은 매듭 묶기와 풀기의 구조를 역재생시킨다. 오늘날의 프레임 하에 어떤 시야가 가능한가의 문제는 정희민의 작업에서도 흥미롭게 논의된다. 정희민은 오늘날 인터넷 환경에서의 정물을 실제 공간에 중첩시킴으로써 제한된 양감을 허락하는 이동 통로(문)에 반응하는 이미지를 설치한다. 이는 정희민이 집중적으로 탐구했던 문제이기도 하다. 김익현은 “사물이 본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일까”라는 근래의 질문에서 출발하여 “검은 유리”와 한국 현대사를, 그가 발견한 “바둑에 잠재된 기보와 복기”의 이중성을 그가 착안한 “사진술”로 저장한다.
시청각이 «정물화전»을 기획한 두 번째 이유는 몇 해 전부터 과일에 대한 프로젝트를 해보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인왕산 이미지에 대응하고자 했던 시청각의 첫 전시에 대한 반대 급부이자 어떤 항으로서 «정물화전»을 본다. 실내에서 그림(작품)을 본다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지, 앉아서 봐야 하나, 움직이면서 걸어가면서 봐야 하나, 눈으로 봐야 하나, 촬영해서 가져가서 봐야 하나. 질문은 여기서 자르기로 하자. 눈앞에 가져다 놓은 «정물화전»은 소멸되어가는 어떤 눈을 이야기한다. 그것을 우리는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잠시 뇌 속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1) 김예진, ‘이도영의 정물화 수용과 그 성격-사생과 내셔널리즘을 통한 새로운 회화 모색’, 미술사학연구 2017. 김예진은 주전자에 표현된 명암은 서양화법을 완전히 숙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실재감을 표현하려는 시도에서 나왔다고 분석한다.
2) 이마하시 리코, ‘전설의 기호-호쿠사이의 <수박도>와 칠석’. 미술사논단, 2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