껴안을 수 없는 세계 (Un-Embraceable You)



장혜정 | 독립 기획자




정희민의 화면에는 혼합되거나 스며들지 못하고 유리된 세계들이 공존한다. 그 세계들은 분리된 시간들이기도 하고, 차원이기도 하고, 매체적 또는 표현적으로 상충하는 항들이기도 하다. 이 모순되고 충돌하는 항들은 정희민을 통해 기존의 맥락에서 탈출하고 새롭게 중첩되고 배열되고 마주친다. 그러나 그 만남의 결론은 결코 하나의 상태로 함께 할 수 없음을 계속해서 확인하며 쓸쓸해지거나, 갈등이 증폭되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그럼에도 정희민은 그 세계들을 하나의 화면에 모아놓는다. 그러니 그의 노력은 불가능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서러운 과정에 가깝다. 마치 양손의 손가락을 억지로 길게 하여 절대 한 번에 만질 수 없는 마주 보는 양쪽 벽을 한 번에 더듬으려고 애를 쓰던 레베카 호른(Rebecca Horn, b. 1944)의 애처로운 시도1처럼. 한계를 극복하려는 처절한 노력과는 상관없이 그 안에 결박된 듯한 형국이 되어버린 호른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정희민이 그의 양팔을 최대한 길게 뻗어 한 번에 껴안고 싶었던 세계는 어떤 것일까?


몸이 없는 이미지

생각해보면 본래부터 예술가들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다. 다만 그렇다고 믿었거나 대체가 된다고 위안을 받을 수 있는 단단한 지지체를 이용해 그들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얹히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니 이미지는 한 번도 몸을 가진 적이 없다. 매번 새로운 지지체에 다른 방식으로 얹혀질 뿐이었다. 그런데 오랜 시간 통용되어온 그 사실이 정희민에게 특별히 서글프게 다가온다면, 그것은 그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이미지가 빈 몸임을 끊임없이 확인하게 되는 시대이기 때문일 테다.
세상은 발달이라는 미래지향적인 목표를 향해 이동하고 우리의 손은 점점 더 허공을 맴돈다. 납작함에서 더 나아가 투명해지고 있는 지지체는 이미지가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 몸이 없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정희민은 이러한 시대에 노골적으로 존재하는 비물질의 이미지와 여전히 손에 쥐는 물질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연민과 고민을 화면 안에 중첩시킨다.
그의 화면에서는 물질과 비물질이 혼재한다. 주로 3D 웨어하우스(3D Warehouse)에서 가져오는 대상들은 비어 있으나 구체성을 띤 형상을 가졌다. 정희민은 캔버스에 아크릴로 최대한 왜곡 없이 그러나 최대한 납작하게 이 대상들을 모방해내고, 그 위에 젤 미디엄(gel medium)으로 비정형의 물질 덩어리를 올려놓는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려진 회화를 전면에 선보인 2018년 개인전 《UTC -7:00 JUN 오후 3시의 테이블》(금호 미술관)에서 그 덩어리의 역할은 얼룩에 가까웠다. 매끈하고 납작한 이미지에 올려진 둔탁한 덩어리는 이물질처럼 화면에 잡음을 만들며 깊이를 상실해가는 세계에서 찰나적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각성의 시간과도 같은 것이었다.

반면 2019년 개인전 《An Angel Whispers》(P21)은 물질과 비물질이 충돌하는 순간이기보다는 몸이 없는 이미지에 대한 위로이거나, 여전히 촉각적 경험을 갈구하는 자신의 미련한 욕망에 대한 고백에 가까울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지기 위해’ 영원한 삶을 포기한 천사의 이야기2에서 비롯된 전시의 제목처럼 정희민은 자신이 껴안고 싶은 대상에 촉각성을 부여했다. 그리하여 깊이 없는 이미지 위에 얹혀진 두터운 젤 미디엄은 정처 없이 떠도는 이미지가 머무는 임시적인 몸이 되었다.


뒤섞인 추상과 구상

물질과 비물질이 혼재된 정희민의 화면에는 일종의 추상성이 흐른다. 그러나 이것을 추상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은 구상으로 받아들여야 타당한 추상의 형식을 가진 이미지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정희민이 꾸준하고 빈번하게 바라보고 가져오는 대상은 스케치업(SketchUp) 프로그램 속에 존재한다. 그가 바라보는 디지털 목업(mock-up) 이미지들은 스케치업이라는 가상의 시공간에서 실재라고 ‘감안’할 수 있을 최소한의 요소만을 가지고 만들어진, 결국 폐기를 전제로 하는 가장 애처로운 존재이다. 따라서 정희민은 이 존재들이 처한 공허함, 차가움, 외로움을 자신의 화면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UTC -7:00 JUN 오후 3시의 테이블》에서의 작업을 포함한 이후 많은 작업에서, 웹으로부터 가져온 대상들은 임의적으로 배치되고 과도하게 확대된다. 과잉 확대된 대상은 익숙한 시점에서 벗어나 크기를 가늠할 수 없고 중력이 소멸된 상태로 표현되지만, 에어스프레이로 성실히 모방된 표면은 여전히 구체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 구체성을 가진 각각의 대상은 내용을 해석하거나 설명하기 위함이 아닌, 그 자체로 비물질 이미지의 가련함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추상적 형상으로 자리한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 즉 형식적으로 추상성을 가졌지만 재현적 이미지로 보아야 타당한 작업들이 있다. 특히, 디지털 이미지의 가상성과 상반되어 증폭하는 촉각에 대한 욕망이 큰 주제였던 개인전 《An Angel Whispers》에서 보여준 일련의 작업들이 그중 하나다. 예컨대, <바다가 된 개의 초상>(2019)는 그가 추상화시킨 개의 초상이 아닌, 그의 머리에 떠오른 이미지 바로 그대로의 재현이다. 정확한 정체성을 분실한 존재, 축축하게 젖어 흘러내릴 것만 같은 존재인 디지털 시대의 이미지의 처지가 투영된 재현적 이미지에 가깝다.
허나 그 둘 사이는 결국 엄격히 분리되거나 정의 내려지지 않은 채 공존한다. <Erase Everything But Love>(2018)와 <May Your Shadow Grow Less>(2018)을 가득 메운 이미지들은 추상적이기도 하고 동시에 재현적이기도 하다. 흡사 정돈되지 않은 화면처럼 모든 것들이 이곳저곳에 흩어지고 흩뿌려진 잔해들처럼 존재한다. 구체적 표면을 가진 이미지들은 대부분 찢기거나 부서진 상태이고, 온전한 형태는 또 다른 형태로 가려지며 재현성을 위협받고, 가장 위에 올려진 젤 미디엄마저도 비정형과 정형 사이를 오고 간다. 이렇게 추상과 구상이 뒤섞인 그래서 어쩌면 추상도 구상도 아닌 정희민의 화면은, 아무리 포착하려고 애를 써도 연거푸 실패하고 마는 오늘의 이미지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하다. 세상 속에 있지만, 실제도 허상도, 추상도 구상도 아닌 이미지 그 자체로, 자칫하면 지나쳐 버릴 수 있는 파편 같은 상태로 말이다.


그 사이의 빛

정희민이 어떻게 이 흩어지는 파편을,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고 부유하는 조각들을, 지지체 없이 방황하는 이미지를, 하나의 화면에 붙잡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어쩌면 그것은 빛일 수 있다. 스케치업을 하나의 세계로 받아드릴 때 정희민에게 강력하게 작용한 기제는 그 안에 존재하는 ‘가상의 빛’이었다. 지구라는 세계에 사는 그 누구도 하나의 태양, 즉 하나의 빛을 공유한다는 불변의 진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스케치업에는 지구와는 완전히 무관한 빛이 존재한다. 각도와 강도의 지정값에 따라 가상 공간의 모든 곳을 차별 없이 비추는 빛의 존재는 정희민이 이 가상의 공간을 하나의 세계로 인정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2017년 참여한 단체전 《스노우 스크린》(아카이브 봄)에서 정희민은 화면 뒤에 빛을 놓았다. 빛이 가까이 닿은 부분은 종이의 물질성이 사라지고 어렴풋이 그가 그린 붓의 흔적만이 남았다. 지지체인 종이가 투명해지자 겨우 살아남은 이미지는 물질도 비물질도 아닌 상태로 우리에게 목격되었다. 그러므로 정희민에게 빛은 틈 사이를 파고드는 것이자, 떨어진 사이를 결합시키고 또는 벌려 놓는 것,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근거이자 세계를 인식하게 하는 기제인 것이다.

최근 전시 《On Vacation》(인천아트플랫폼, 2019)에서는 빛과 그림자가 작업/전시의 일부로 들어와 있었다. 이는 캔버스만이 아닌, 공간과 그 사이를 비추는 빛까지 자신이 만들어내는 이미지가 얹혀지는 지지체가 될 수 있음을 선언하는 제스처일 수 있다. 여전히 이미지는 견고한 몸을 갖지 못한 채 방황하는데, 이를 포착하기 위해 정희민이 선택한 것이 빛이고 심지어 그보다 더 나약한 그림자라는 것은 무기력하면서 동시에 희망적이다. 빛은 대상을 투명하게 하기도 하고 불투명하게도 한다. 보는 이의 시야를 제한할 수도 혹은 아예 멀게 할 수도, 그리고 아주 세세히 또는 멀리 보게 할 수도 있다. 비록 어둠과 만날 때 머뭇머뭇 끊어질 듯해도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빛은 어쩌면 파편처럼 유리된 세계들을 가장 느슨하게 껴안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1) <Scratching Both Walls at Once>(1974-5) by Rebecca Horn(b.1944). 레베카 호른은 1970년대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로 신체를 통제하거나 확장하는 방식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Scratching Both Walls at Once>(1974-5)는 1.5미터가 넘는 길이로 연장된 손가락 장치를 착용하고 두 팔을 최대한으로 뻗으며 한 공간에서 마주보는 두 벽을 한번에 만지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이 장면이 떠오른 이유는 김홍기 비평가가 정희민에 대하여 쓴 「거미 여인」(2018) 때문일 수도 있겠다.
2)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über Berlin)>,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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