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잔의사과를넘어


김홍기, 미술평론




말년의 세잔은 30대 중반의 에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원기둥, 구, 원뿔을 통해 자연을 다루라고 조언했다. 이른바 ‘모던아트의 아버지’는 초상화, 정물화, 풍경화 등 고전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기하학을 도입하여 추상과 구상의 경계에서 새로운 회화의 근본적인 혁신을 꿈꿨던 것이다. 모던한 정신이 곧 새로움을 추구하는 정신이라면 여전히 회화의 갱신을 모색하는 오늘날의 작가는 모두 세잔의 후예일 것이다. 전현선과 정희민의 작업을 논하기에 앞서 거창하게 세잔을 들먹인 이유는 이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세잔의 모던한 정신을 유사한 방식으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현선은 2014년 이래로 줄곧 원뿔을 화면의 주된 모티프로 사용해왔으며, 올해 개인전에 걸린 회화 <모여있는 도형들>에서는 평면 위에 원기둥, 구, 원뿔이 보란듯이 놓여있다. 또한 작가는 그의 화면 속 이름없는 산(생트-빅투아르?)에 대해서 그것의 근원이 원뿔이라고 말한다. 세잔처럼 기하학을 통해서 자연을 다루는 것이다. 다른 한편, 정희민은 그만의 독특한 정물화로 금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는데, 유독 빈번히 그려진 대상인 사과는 너무나도 세잔적인 소재일뿐더러 간혹 보이는 꽃병과 꽃도 세잔이 꽤나 즐겨다뤘던 소재다. 또한 그는 사과를 비롯한 3개의 과일을 그린 회화를 <Three Spheres>라고 작명함으로써 세잔의 조언을 은연중에 내면화하고 있으며, 사과든 꽃이든 꽃병이든 작가마저도 이 정물의 세계에서는 동등하게 어떤 덩어리로 인식된다는 정희민의 발언은 세잔의 자연관과 자못 유사해 보인다.




‘디지털적 무의식’의 이미지




세잔이 고전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회화의 혁신을 실험했던 것처럼, 이들은 세잔의 문제의식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동시대에 걸맞게 변용하고 갱신하려 한다. 그 시도는 두 가지로 서술될 수 있다. 첫째, 이들의 회화는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지향한다. 전현선의 개인전 <나란히 걷는 낮과 밤>은 다만 번갈아 놓일 수밖에 없는 낮과 밤이 나란히 걷게 되는 초현실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그의 캔버스는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의 공존 혹은 마주칠 수 없는 것들의 마주침”이 가능한 회화적 사건의 현장으로 제시된다. 정희민의 정물화는 꿈의 세계다. “UTC-7:00 JUN 오후 세시의 테이블”의 협정세계시는 지리적 좌표와 무관한 개연적인 빛의 각도와 강도를 지정할 뿐이며, 그곳의 여러 사물은 무게와 부피가 희박하여 납작한 평면으로 보이는 이율배반적인 ‘덩어리’다. 둘째, 이들은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구현해내기 위해서 디지털이미지를 주요하게 활용한다. 전현선은 인터넷에서 찾아낸 이미지를 띄운 아이패드 스크린을 보면서 캔버스를 채워나가며, 정희민은 3D 모델링 프로그램으로 가상의 태이블에 사물들의 오픈소스 이미지를 배치함으로써 정물화의 소재를 확보한다. 이들에게는 디지털로 매개된 현실과 가상의 무수한 이미지가 무의식에 대륙을 구성하는 소립자인 것이다. 사진을 통해서 광학적 무의식이 발견되었다는 벤야민의 주장을 바꿔 말하자면, 오늘날에는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서 ‘디지털적 무의식’이 가시화되는 것이다.

전현선의 전시에서는 두 부류의 작업이 눈에 띈다. 하나는 전시와 동명인 <나란히 걷는 낮과 밤>이라는 연작으로서 15점의 회화가 전시장 한 벽에 가로 5점 세로 3점으로 빈틈없이 진열되어 거대한 이미지의 파노라마를 이룬다. 다른 하나는 대부분 정사각형의 좀 더 작은 회화들인데 이것들은 일렬로 적당한 간격을 두고 나란히 설치돼있다. 이렇게 대조적인 두 방식으로 전시된 전현선의 캔버스는 마치 하나의 모듈처럼 작동하는 듯하다. 즉, 때로는 독립적인 개체로서 다른 회화와 느슨한 관계를 맺으면서 나란히 놓이고, 때로는 다른 회화들과 단단히 결합하여 보다 상위의 복합적인 단위를 형성하는 요소가 된다. 원뿔, 구, 원기둥이 각각 독립적인 도형이기도 하면서 서로 결합해 자연을 구성하는 기본요소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언급은 캔버스를 채우고 있는 형상들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여러 기하학적 도형들뿐만 아니라 복숭아, 무화과, 벽돌담, 동물, 산과 숲, 중세회화의 인물 등 그가 즐겨 쓰는 여러 형상들은 거대한 파노라마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작은 회화의 주체적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렇듯 그의 화면은 결합과 분리가 공존하는 몽타주의 작업대다. 작가는 이에 대해서 단어와 문장의 관계에 빗대어 이야기하기도 한다. 즉 각각의 형상이 단어라고 한다면 그것들을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결합하고 분리하면서 만들어낸 회화는 추상명사와 구체명사가 뒤섞인 문장과도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급은 초현실주의자들이 각자 임의의 단어를 던져서 우연한 문장을 조합하는 ‘우아한 시체(cadaver exquis)’의 유희를 떠올리게 한다. 전현선은 인터넷에서 발견한 무수한 이미지들을 매개로 익명의 동시대인들과 함께 의식의 세계를 초월한 ‘우아한 시체’의 이미지를 작문해낸다.

  <나란히 걷는 낮과 밤> 연작을 보면 마치 거대한 바탕화면 스크린에 띄워놓은 수많은 윈도우처럼 보이기도 한다. 격자와 같은 이미지의 단면들이 빈번하게 중첩되어 복잡하고 다층적인 구성을 만들어내지만 그것들이 매우 납작한 까닭에 전체적인 깊이가 매우 얕기 때문이다. 이런 효과를 얻기 위해서 작가는 캔버스에 수채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또한 명암이 반전된 네거티브 효과, 복사해서 붙여넣은 듯한 반복적인 모티프, 시대와 장소를 종잡을 수 없는 다양한 도상과 기법의 병치, 줌인과 줌아웃이 뒤섞인 비율 등 캔버스를 채운 여러 요소들은 포토샵과 같은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의 효과를 연상시킨다. 이렇듯 디지털 장치를 매개로 구상된 무의식적 이미지는 수채의 질감을 통해서 구상과 추상, 입체와 평면,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 독특한 회화가 된다.




픽셀로 이루어진 꿈의 공간




그런가 하면, 정희민은 디지털 장치를 더욱 적극적으로 도입하며 동시대성을 반영한 회화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그는 인터넷에서 검색한 3D 모델 이미지를 소재로 삼은 정물화를 선보인다. 이 가상의 디지털 이미지는 작가의 꿈 이미지이기도 하다. 현실과 닮았지만 현실을 넘어서거나 현실에 미치지 못하는, 썩지 않는 우유와 갈변하지 않는 사과와 향기가 없는 꽃의 세계는 디지털로 가시화한 꿈의 세계다. 작가는 마치 꿈속을 부유하듯 3D 모델링 프로그램을 만들어낸 테이블 위를 마우스로 잡아끌며 돌아다닌다. 그리고 그 위에 놓인 일상의 사물을 포착하고 그것을 정물화로 옮긴다. 정희민은 정물의 소재가 가상의 이미지임을 굳이 숨기려하지 않는다. 스크린에 표시되는 사물의 중점이나 지름의 변곡점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긴다. 게다가 그는 이 무균의 사물들이 지닌 초현실적인 속성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과잉의 클로즈업을 수행한다. 시점에 사물을 과도하게 밀작시켜 선과 면의 픽셀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때로는 시점이 사물의 표면마저 통과하도록 강조함으로써 내부와 외부가 뒤섞이는 기이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현실을 시뮬레이션한 3D 모델링의 세계도 역시 원뿔, 구, 원기둥으로 다뤄질 수 있겠지만 더욱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해상도를 좌우하는 픽셀로 이루어진 공간인 것이다.

정희민은 스크린 이미지를 캔버스로 옮겨오면서 디지털 장치와 마주한 동시대회화의 상황을 강하게 의식하는 듯하다. 스크린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족한 것이 아닐까? 굳이 그것에 물질성을 부여해야 한다면 프린팅이 아닌 페인팅을 고집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가 이번에 전시에서 페인팅의 존재근거를 추구하기 위해 시도한 장치는 두가지로 제시될 수 있다. 첫째, 안료(pigment)의 차이를 이용한 장치로서, 캔버스에 아크릴릭으로 충실히 그린 정물화에 겔미디엄이나 유화물감으로 무정형의 얼룩을 남긴다. 둘째, 캔버스(support)의 배치를 이용한 장치로서, 캔버스를 변형시키거나 인접한 캔버스들 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연출함으로써 이미지의 간극을 만들어낸다. 요컨데, 얼룩이나 간극을 통해 안료와 캔버스를 낯설게 만들어 회화의 물질성을 강조하는 전략이다. 비물질적인 납작한 덩어리의 공간에 회화 매체의 물질성을 기입한다. 달리 말하면, 꿈의 가상공간에 현실의 물질적 잡음을 더하여 깊은 잠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것이다. 이처럼 디지털이미지의 비물질성과 회화의 물질성이 맞부딪치는 장소에서 구는 사과가 되고 원뿔은 산이 되기를 멈추지 않는다. 즉 회화는 계속 그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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