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여인

김홍기 / 미술평론가


“오, 미친 아라크네여, 내 눈에 비친 너는,
어느덧 반쯤 거미가 되어, 너를 불행으로 이끈
작품의 찢긴 조각들 위에서 서러워하는구나.”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연옥편>, XII 43-45.



베를 짜는 기예가 몹시 탁월한 리디아 출신의 여인이 있었다. 비록 신의 계보에 속하지 않았지만 신통한 재주를 부렸고, 결코 명문가의 딸이 아니었지만 고귀한 능력을 떨쳤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 여인의 이름은 아라크네였다. 그는 자신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직조하는 솜씨가 뛰어나다고 자만한 탓에 아테나 여신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급기야 여신과 베 짜는 시합을 벌이게 된 아라크네는 주눅이 들기는커녕 제우스가 벌인 난잡한 애정행각을 너무나 생생하게 직조해냈다. 이에 격노한 여신은 아라크네의 작품을 갈기갈기 찢었고 이 불경한 여인을 거미로 변신시켜 버렸다. 그리하여 이 가련한 피조물은 허공에 매달려 이제 꽁무니에서 스스로 자아낸 실로 얇고 질긴 피륙을 짜내기 시작했다.
아라크네가 씨실과 날실로 도모한 작업은 치밀한 모방적 재현이었다. 그의 손끝에서 세계의 만물이 놀랍도록 그럴듯하게 재현되었다. 실재와 너무나 흡사해서 결국 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그런 재현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작품인 모방이 만용을 부리며 신의 작품인 실재를 넘볼 때 신은 가차없이 분노의 몽둥이를 휘둘렀다. 모방으로부터 실재의 권위를 지켜내는 통제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덧 신들의 시대는 저물고 말았다. 난잡한 제우스도 준엄한 아테나도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일 뿐이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실재보다 더욱 실재적인 이미지를 오히려 실재가 다시 모방하는 시뮬라크르의 시대가 열렸다고 하는데, 이제는 이에 대해 분노하고 단죄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아라크네의 후손들은 영원히 직조를 멈추지 않는 제 몫의 운명을 꿋꿋이 수행하며 살아가고 있다. 거미는 지상과 지하, 수풀과 동굴을 가리지 않고 서식한다. 이곳저곳에 무작위로 실을 걸어 팽팽하고 촘촘하게 고유한 세계의 좌표를 직조하고 그곳에 부지불식간에 입장한 먹잇감의 감각을 독으로 마비시킨다.

세계를 모방하는 가공할 재주와 관련하여 오늘날 거미의 주요 서식지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가상공간이다. 이제 거미가 직조해내는 세계의 이미지는 씨실과 날실이 아니라 비트와 픽셀로 구성된다. 가상공간에서 거미의 솜씨는 더욱 막강해서 베틀질의 속도는 헤르츠의 단위로 매순간 경신되고 그 피륙의 짜임새는 해상도의 경이로운 폭증으로 과시된다. 비물질적인 공간에서 거미는 육체의 족쇄에서 풀려나 편재하고, 실재를 모방하는 거미줄은 월드 와이드한 차원을 획득한다. 세계의 이미지가 세계 자체를 너끈히 포섭한 것이다. 구글맵의 이미지가 당신의 공간 지각을 위한 원본이 되고, 내비게이션의 이미지가 당신의 주행 경로를 위한 신탁이 된다. 조밀한 하이퍼텍스트의 정문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당신에게 세계가 열린다. 정확히 말하면 세계의 이미지가 열리는 것이겠지만 어차피 거미의 독으로 다소간 뻣뻣해진 당신의 감각은 현실과 가상을 뚜렷하게 구별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리고 정희민은 이렇게 진화한 거미와 더불어 작업한다. 그는 웹의 무수한 그물코를 헤집고 다니면서 여러 사물의 이미지를 채집하여 캔버스를 채운다. 인터넷의 오픈소스 이미지들을 평면의 스크린에 배치하면서 회화의 소재를 구하는 것이다. 정물이 아닌 정물의 이미지, 풍경이 아닌 풍경의 이미지, 인물이 아닌 인물의 이미지가 그의 작업의 출발점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 원본이란 없는 셈인데 왜냐하면 작업의 소재 자체가 이미 인터넷에서 가공된 모방적, 가상적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즉 그의 작업은 모방의 모방, 이미지의 이미지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복사하기와 붙여넣기로 끝나는 ‘차이 없는 반복’은 물론 아니다. 정희민은 거미와 더불어 무언가를 거래한다. 그가 거미로부터 건네받은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것은 거미의 세계를 수놓은 비물질적 이미지, 비트와 픽셀로 직조한 가상의 이미지, 실재보다 더욱 실재적인 모방의 이미지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그것을 어떻게 가공하고 변환하는가? 그가 거미에게 되돌려주는 ‘이미지의 이미지’는 어떠한 과정의 결과인가?
정희민은 웹에서 가져온 세계의 이미지를 ‘블로우업(blow up)’함으로써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때 ‘블로우업’은 사전적인 두 의미, 즉 ‘확대’와 ‘폭파’를 모두 포함한다. 먼저 ‘확대’의 방법론을 살펴보면, 작가는 과거의 정물화가들처럼 테이블 위에 과일이나 꽃병과 같은 정물의 소재들을 올려놓고 작업을 시작한다. 그렇지만 그의 테이블은 3D 모델링 프로그램 스케치업으로 펼친 가상의 테이블이며 그 위의 정물들도 3D 웨어하우스에서 가져온 디지털 이미지들이다. 작가는 이렇게 배치한 임의의 장면을 과도하게 확대하여 스크린에 구현된 낯선 이미지를 캔버스에 옮긴다. 마스킹 테이프와 에어스프레이 건을 동원해 최대한 충실하게 모방하려 애쓴다. 이렇게 만들어진 반추상 또는 반구상 회화는 매우 질기고 촘촘해 보이던 디지털 피륙의 바늘땀과 솔기를 노출시킨다. 면과 면이 맞닿은 자리에는 때로는 시침질한 것처럼 때로는 박음질한 것처럼 상이한 밀도와 채도의 픽셀들이 줄지어 나타난다. 디지털 이미지를 확대하여 웹의 세계를 구성하는 이미지의 기하학적인 최소 단위를 가시화하는 것이다.
이처럼 정희민은 과장된 확대를 통해 디지털 이미지의 올을 끌러 거미의 세계를 관통하는 성긴 틈새를 마련한다. 그리고 채색된 캔버스 위에 젤미디엄으로 군데군데 무정형의 자국을 남겨 ‘이미지의 이미지’에 어떤 이물감을 주입한다. 캔버스에 얹은 매체의 강도 차를 통해서 회화의 물성을 슬쩍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캔버스는 디지털 이미지의 비물질성과 회화의 물질성이 거래되는 장소이다. 그곳에서 작가는 비물질적인 디지털 이미지를 성심껏 모방하면서도 그 틈새를 가까스로 비집고 들어가 물질적인 회화적 충동을 보란듯이 실천한다. 이는 디지털 기기에 의해 매개된 시각적 환경에서 작업을 추구하는 동시대 작가들이 직면한 역설적 조건을 정확히 보여준다. 디지털 이미지의 비물질성에 대한 매혹과 캔버스와 안료의 물질성에 대한 의욕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정희민은 두 번째 의미의 블로우업, 즉 폭파의 방법론을 구사한다. 마치 아라크네의 작품을 갈기갈기 찢었던 아테나 여신을 흉내내듯이 작가는 웹에서 내려받은 여러 종류의 이미지들을 해체시켜 그 조각들을 캔버스에 흩뜨려 놓는다. 예컨대 <May Your Shadow Grow Less>와 <Erase Everything But Love>가 이와 같이 폭파되어 널브러진 디지털 이미지의 폐허를 보여준다. 가상의 꽃병 이미지들이 다소 일그러져 그려진 캔버스에 사금파리 같은 파편들이 이곳저곳 흩어져 있기도 하고, 전원의 풍경이 그려진 캔버스에 무수히 많은 하트의 이미지들이 어떤 압력에 의해 폭발한 것처럼 흩뿌려져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번에도 작가는 젤미디엄으로 회화의 물성을 강조하는 이물감의 자국을 캔버스 곳곳에 남겨 두어 비물질적인 이미지들의 잔해에 물질적인 무게와 두께를 덧입힌다.
그렇지만 정희민은 아테나 여신이 아니라 인간인 까닭에 오늘날의 거미가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환영의 이미지를 직조한 것에 대해 형벌을 내릴 자격이 없다. 오히려 그 거미의 혈통이 아라크네라는 여인에게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작가는 아테나 여신보다는 거미와 훨씬 더 가까운 친족관계를 형성한다. 어쨌든 거미는 그와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의 후손인 것이다. 그가 거미의 이미지에 매혹되어 모방을 모방하면서도 그것에 저항하여 폭파의 제스처를 취하는 것은 그와 거미 간의 뜻밖의 근친성에 대한 양가적 감정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예기치 못한 동족과 대면함으로써 친숙하고도 두려운, 이른바 언캐니한 감정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거미의 이미지를 갈가리 찢는 것은 거미를 처벌하는 신적인 결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내면의 복합성을 부정적으로 해체하는 제스처에 가까워 보인다.
폭파는 파국으로 이어진다. 무언가를 터트리고 깨뜨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희민의 회화도 파국의 장면을 보여준다. 찢어지고 뒤집히고 무너진 이미지들이 그의 캔버스에 즐비하다. 그런데 그것은 참혹하기보다는 차라리 허망한 장면이다. 파국의 희생양은 그저 이미지일 뿐이다. 극히 탁월한 솜씨로 직조된, 현실이 거꾸로 모방하려 할 만큼 촘촘하고 튼튼한 짜임새를 갖춘, 그렇지만 무게도 두께도 없이 환영처럼 존재하는 이미지일 뿐이다. 감정을 대신하는 하트의 이미지든, 기억을 대신하는 타임라인의 이미지든, 또는 휴지통에 쑤셔박혀 삭제될 운명에 처한 이미지든, 그것들이 폭파되면 그 파편들 외에 드러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들은 주인 없는 가면과도 같다. 하트의 가면 뒤엔 감정의 주인이 없고, 타임라인의 가면 뒤엔 기억의 주인이 없다. 모두를 대신하고 있지만 아무도 쓰고 있지 않은, 이상한 가면의 세계인 것이다. 정희민이 폭파시켜 드러난 디지털 거미의 작품은 이처럼 가면으로 이루어진 허망한 시공간이다. 정체성은 증발하고 페르소나만 남겨진 피상적인 시공간이다. 그는 이 거대한 이미지의 피륙에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느낀다. 잘 짜인 가면 뒤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는 데 도취하면서도 자신의 감정과 기억이 정박할 정체성을 지우는 데 저항하는 것이다. 디지털 이미지의 비물질성에 매료되면서도 캔버스와 안료의 물질성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 안에서 거미의 세계에 대한 친숙함과 두려움이 맞부딪칠 때 그 세계를 폭파할 불꽃이 튄다.

연옥의 길목에서 단테는 아라크네가 반쯤 거미가 되어 서러워하더라고 전한다. 그 서러움의 정체가 기구한 신세에 대한 회한인지 부당한 운명에 대한 분노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둘 다일 수도 있고 아예 다른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서러움이 인간의 마음이라면 아라크네는 여전히 반쯤은 인간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여기 정희민의 <Decent Woman>이라는 또 다른 여인이 있다. 이번에도 정희민이 폭파시킨 이 여인의 이미지는 찢어지고 조각나 있다. 기묘하게 서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이 퍼즐 같은 얼굴의 한복판에는 거미 한 마리가 무심코 앉아 있다. 이 여인이 아라크네의 초상인지 정희민의 자화상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둘 다일 수도 있고 아예 다른 것일 수도 있다. 다만 거미 여인의 서러움을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 서러움이 남아 있는 한에서 거미 여인은 오늘날의 거대한 거미줄에 완전히 포박되지 않을 것이다. 정희민의 서러움은 납작한 디지털 이미지를 확대하고 폭파하면서 회화의 존재근거를 추구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서러움은 곧 작가의 정체성인 것이다. 이것은 축복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안타깝게도 연옥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무한정 유예된 곳이다.





Spider Woman

KIM Hong Ki / Art Critic


“O mad Arachne, I am seeing you
already half spider, wretched on the ragged remnants of work
that you had wrought to your own hurt.”
Dante Alighieri, Divine Comedy-Purgatorio, XII 43-45.


There was a woman from Lydia, who had extraordinary skills in weaving cloth. Although she did not belong to the lineage of God, she had magical skills, although she never was a daughter of family of high social status, she was renowned for her noble abilities. The name of this woman who appears in Greek mythology is Arachne. For her conceit in her weaving skills to be better than anyone else in the world, Arachne made the Goddess Athena outraged. When Arachne ended up in a weaving competition with the goddess, she vividly weaved the promiscuous love affair of Zeus,
rather than being intimidated. Outraged by this, the Goddess tears apart Arachne’s work into tiny pieces and transformed this profane woman into a spider. That is how this pathetic creature came to be hung up in the air, weaving tough textiles with threads self-generated from its tail.

The work that Arachne conducted using weft and warp was a thorough memetic representation. Everything in the world was represented with surprising plausibility at her fingertips. It was a representation that was so close to the real that it disturbed God. When copy, a work by humans, crossed the line boasting its dexterity and tries to breach the boundary into the realm of the real, a work by God, God mercilessly punishes, which means that it is possible to exert control to defend the authority of the real from the copy. However, the time of Gods has come to an end. Promiscuous Zeus and strict Athena are also tales from distant old times. According to Baudrillard, the time of simulacra is open, where the image more real than the real is copied back by the real, there exists no God anymore who outrages and punishes. Meanwhile, the descendants of Arachne persist on their lives, fulfilling their destinies without stopping weaving forever. Spiders live everywhere, ranging from ground and underground, and bushes and caves. They randomly hang threads, tightly and densely weave the coordinates of a unique world, and paralyze the senses of the
prey that inadvertently entered there.

Speaking of formidable skills, the main habitat of today’s spiders is the virtual space of digital technologies. Now, the image of the world woven by the spider is composed not of weft and warp, but of bit and pixel. Dexterity of the spider in the virtual space is even more powerful so that the record of speed of looming is broken by hertz, and the weave of textile is shown off by the marvelously huge rise in resolution. In an immaterial space, the spider’s presence is ubiquitous, being unbridled of the body, and spider web that imitates reality gains a wider dimension — the
image of the world encompasses the world itself. Images on Google Maps become the original for your spatial perception and images on the navigation become an oracle for your driving route. Only when you pass the entrance door of the dense hypertext the world opens to you. To be specific, it is about the image of the world opening up to you, but your senses numbed by the poison of the spider do not try to make a clear distinction between reality and virtuality.

CHUNG Heemin works along with the evolved spider, navigating through the numerous nets of the web and gathers images of various objects to fill the canvas. By arranging open source images from the Internet on the two-dimensional screen, CHUNG is searching for the subject matter of painting. Images of a still life that is not a still life, the image of a scene that is not a scene, an image of the human subject that is not human subject — those are the starting points of CHUNG’s work. Therefore, it can be said that there is no original version in CHUNG’s work because the subject of
the work itself is mimetic, a virtual image processed on the Internet. In other words, CHUNG’s work is a copy of the copy –– the image of the image. However, it is of course not a “repetition without a difference” that ends up being copied and pasted. CHUNG Heemin trades something with the spider. What CHUNG is handed by the spider seems to be obvious: immaterial images that embroider the world of the spider, virtual images weaved by bit and pixel, an image of the copy that is more real than the original. Then, how does CHUNG process and transform it? What was the
process of the outcome as “image of image” that CHUNG returns to the spider?

CHUNG Heemin makes a difference through a “blow-up” of the images of the world gathered from the web. Then, this “blow-up” includes two literal meanings, that is, “enlargement” and “explosion.” To begin with, in terms of the methodology of “enlargement,” the artist begins work by placing the subject matter for the still life such as fruits and vases on the table like still life painters in the past. However, his table is a virtual one unfolded by SketchUp –– a 3D modeling program –– and the still life objects are also digital images from 3D Warehouse. The artist excessively enlarges these arbitrarily arranged scenes and brings the unfamiliar images realized on the screen. Using masking tape and an air spray gun, CHUNG works hard to imitate them as sincerely as possible. The semi-abstract or semi-figurative paintings produced through this process expose the stitches and seam of the digital textile, which seemed to be very tight and dense. Where different planes meet, pixels of disparate density and chroma level appear, as if they were tacked or sometimes backstitched. It is to enlarge the digital image for visualization of the smallest geometric
unit of the image that consists of the world of web.

In this way, by unraveling the thread of the digital image through exaggerated magnifying, CHUNG Heemin prepares a loose gap that runs through the world of the spider. After that, CHUNG leaves an amorphous vestige with the gel medium on the painted canvas, imbuing some incongruous sense into the “image of the image.” That is, to secretly emphasize the materiality of the painting through the differences in intensity of the mediums placed on the canvas. Therefore, his canvas is a place where immateriality of digital image and materiality of the painting are exchanged. There, while the artist wholeheartedly imitates an immaterial digital image, he manages to get into the gap in it and
boastfully practice a material, painterly impulse. This precisely shows the paradoxical conditions contemporary artists face while pursuing artistic practice in the visual environment mediated by digital devices. The fascination towards the immateriality of the digital image and the aspirations for the materiality of canvas and paints coexist.

Meanwhile, CHUNG Heemin adopts the second meaning of a blow-up or the methodology of a bombing. As if CHUNG mimicked Athena Goddess who ripped Arachne’s work in pieces, the artist deconstructs various kinds of images downloaded from the web and scatters those fragments on the canvas. For example, May Your Shadow Grow Less and Erase Everything But Love shows the ruins of digital images that have been bombed and scattered. On the canvas where a distorted image of the virtual vase is painted are shattered pieces of glass scattered everywhere, and countless images of hearts are scattered on the canvas depicting a scene of a rural landscape as if it exploded from
some pressure. This time, too, using gel medium CHUNG left the marks of incongruousness, which puts emphasis on the materiality of the painting throughout the canvas so that the material weight and volume can be added on the fragments of the immaterial images.

But then, since CHUNG Heemin is not Athena the Goddess but a human, CHUNG does not have a right to punish today’s spiders for weaving illusionistic images that is more real than reality. Rather, in that the spider’s lineage is connected to the woman called Arachne, CHUNG forms a much closer kinship to the spider than to Athena the Goddess. Anyhow, the spider is the descendant of a human being, who is no different from CHUNG. The fact that CHUNG takes a resistant gesture of an explosion while copying the copy while being fascinated by the spider could be compared to the ambivalent feelings toward the unexpectedly incest-like nature of his relationship with the spider. It
is about developing familiar, yet fearful or uncanny feelings when encountered with an unexpected relative. If this is the case, then, the artist tearing the image of the spider in shreds is not from a divine decision, but rather close to a gesture to negatively deconstruct the complexity inside of him.

Explosions lead to catastrophe. That is because it is about exploding and breaking something. CHUNG Heemin’s paintings show the scenes of catastrophe. CHUNG’s canvas is filled with images that are torn apart, flipped over, and collapsed. But then, they are the scenes that seem rather futile than brutal. The scapegoat of the catastrophe is a mere image — it is an image that is woven with high dexterity, that is woven densely and tightly so that the real would reversely attempt to copy, but that exists as an illusion without any weight or volume. Whether it is an image of a heart
that replaces emotions, or images that substitute memories, or an image doomed to be put into the trash bin and deleted, when they explode, nothing except its fragments remain. They are like masks without their wearers. There is no holder of emotions behind the mask of heart, and there is no holder of memories behind the mask of the timeline — this is a strange world of masks where the masks are substituting everyone, but are not worn by anyone. The work of the digital spider that CHUNG Heemin revealed through explosion is a vain spacetime composed of these masks — that is, a spacetime where identity evaporated and only personas are left. Towards this immense textile of the image, CHUNG feels fascination and fear at the same time. It is to be immersed in leaving one’s own identity behind the well-woven mask, but at the same time resisting against having the identity erased, on which one’s emotions and memories will be grounded. It is to be fascinated by the immateriality of the digital image while resisting with the materiality of the canvas and paints. In this way, when the familiarity and fear of the world of the spider collide inside of the artist, the flame that will blow the world away sparks up.

On the way to purgatory, Dante reports that Arachne is sad over being almost half-spider. We are not able to know whether the spleen is remorseful about its bad luck, or rage towards its unfair fate. It can be both, or it can be something totally different. But then, if sadness is a human emotion, we can assume that Arachne is still half-human. And here is another woman, which is CHUNG Heemin’s Decent Woman. In this work, too, the image of this woman that CHUNG Heemin exploded is ripped apart and fragmented. At the center of this puzzle-like face that bears a weirdly
subdued sadness, a spider is sitting in an indifferent manner. We do not know whether this woman is a portrait of Arachne or a self-portrait of CHUNG Heemin. It can be both, or it can be something totally different. We can only assume the spleen of the spider woman. As long as the sadness remains, the spider woman will not be completely captured in today’s enormous web. CHUNG Heemin’s sadness is a driving force to pursue the grounds for painting’s existence, by enlarging and exploding flat digital images. Therefore, the artist’s spleen is the artist’s identity. Is the fate of the spleen bliss or curse? Unfortunately, purgatory is where answers to this question are indefinitely postponed.






정희민의 회화: 우는 데이터

김정현 / 미술비평가, 독립큐레이터




#.

한 편의 사랑 영화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1987년, 아직 삼심대 초반이었던 영화감독 빔 벤더스가 후에 그의 절대적 대표작이 되는 <베를린 천사의 시>를 내놓았다. 마치 한때 이탈리아의 교양인들이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 어두운 숲에 처했었네”하고 단테의 『지옥』 첫 연을 읊었듯이, 1993년 한국에서 개봉한 빔 벤더스의 영화를 본 씨네필들은 ‘베를린의 하늘(Der Himmel Ueber Berlin)’이라는 원제가 매우 낭만적으로 의역된 탓인지 브루노 간츠(천사 다미엘)가 영화 오프닝에 낭송하는 페터 한트케의 시 <아이의 노래>를 “아이가 아이였을 때”하고 암송했다. 오래된 영화를 느닷없이 꺼내든 이유는 정희민과의 대화에서 느닷없이 ‘사랑’이라는 표현을 들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작가는 예전 작품 제목에 사랑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이브》전(2018)에 출품한 <Erase Everything but Love>(2018)를 두고 어느 평론가는 SNS의 버튼(‘마음에 들어요’) 아이콘을 연상했는데, 내가 작품을 구경하러 작업실에 방문하기 전에 먼저 작가의 입으로 들은 사랑이라는 말에는 1987년생 정희민의 작업을 동시대의 디지털 환경에 반응하는 새로운 세대의 회화로 분류하려는 자동적 반응에 제동을 거는 묘한 울림이 있었다. 사랑이라니... 개인사든, 취향이든, 감수성이든 발언의 배경을 묻는 과정에서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지기 위해’ 인간이 되려는 천사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사랑의 촉각성이나 육감적인 사랑의 은유에 나는 즉각 납득이 갔다가 다시 위화감을 느꼈다.

  그 정체를 밝히기 위해 다른 사랑 영화와 비교해보려고 한다. 비교적 최근, 한국에서 2014년에 개봉한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그녀(Her)>(2013)는 호아킨 피닉스가 맡은 남자 주인공과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사의 사랑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사랑의 모습을 충격적으로 보여줬다. 사만사의 목소리 연기를 한 스칼렛 요한슨은 이 불가능한 사랑의 풍경에 강력한 설득력을 부여했다. 만약 포스트 인터넷 시대의 회화만큼 사랑을 새로운 것으로 묘사해야 한다면 사만사는 그러한 아이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비 물질적이고 반 촉각적인 인공지능 운영체제, 데이터와의 사랑.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천사는 종종 주인공처럼 인간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편재하는 존재로부터 벗어난다. 다미엘은 그가 사랑하는 마리온의 시간 속으로 ‘나왔다’. 반면 <그녀>에서 주인공 테오도르는 사만사와 곧바로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의 편재성을 의식하고 멀어진다. 그녀는, 데이터는 ‘날아갔다’. 새로운 시대의 사랑의 풍속화보다 오래된 낭만적 환상이 솔깃한 이유는 단순히 새드 앤딩(이별)이 아닌 해피 앤딩(연애의 시작)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정희민은 왜 포스트 디지털 ‘세대다운’ 사랑의 새로운 형태를 상상하는 대신, 자신의 출생연도에 나온 낭만적 사랑에 관심을 가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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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내가 무엇을 만지고 싶나” 자문한다는 작가의 말은 분열적인 것으로 들린다. 사진이나 영화와 같은 기술적 복제 매체를 다루지 않고 여전히 수공적인 회화 매체를 다룬다는 점에서 갈등은 증폭된다. 그리고 ‘가상에 실체감을 부여하고 싶다’는 전통적인 이미지 제작자들의 욕망은 기이하게 왜곡된다. 그림이라는 가상이 실제가 되는 꿈 대신, 그림이라는 가상이 더욱 더 가상에 가까워지기를 바란다. 관념으로서의 가상이나 열등한 가치체계에 속한 가상이 아니라, 모방의 대상으로 새롭게 부상한 가상을 닮으려는 것이다. 정희민은 3D 모델링 프로그램 스케치업으로 렌더링한 ‘디지털 이미지’를 ‘아날로그 이미지’로 전환한다. 이것은 세계와 재현에 관한 전통적인 이미지 제작의 구도로부터 벗어난다. 모방이라는 말은 즉각적으로 전후 관계를 위계 관계로 만들고, 모방은 세계와 사물을 욕망하는 행위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3D 모델링 프로그램이 도구적 수단을 넘어 인식을 규정하는 변화한 시대에 그 안의 사물은 현실을 모방하거나 대리보충하지 않고 그 나름의 자족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만들어진 또 하나의 세계를 캔버스로 옮기는 작가는 그 이질적인 존재를 인간적인 시간 속으로 끄집어 내어 만질 수 있게 하려는 것일까. 3D 모델링 프로그램 속 디지털 이미지는 마치 천사 다미엘이 인간을 동경하듯 캔버스 위로 옮겨와 만져지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가? 이런 비-인간의 시점은 이미지의 매체 변환을 지나치게 낭만화하는 듯하다. 디지털과 회화의 관계에 대한 빠른 해소의 욕구가 감지되지 않나. 시점을 바꿔, 결국 작가가 만지고 싶은 게 영원히 부유하는 사만사 같은 3D 모델링 프로그램 속의 존재라면 회화적 모방의 행위는 사랑의 불가능성과 욕망의 억압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정희민은 극도로 통제된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다. 엄격한 마스킹으로 우연을 배제하고 픽셀을 하나씩 채워가며 이미지를 제작하려는 듯이 강박적인 인내를 발휘한다. 모니터 속에서 일시적으로 깨진 화면은 캔버스 위에 재현될 때 퍼즐 조각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끼워 맞춰진다. 디지털 이미지의 시각적 효과는 무수한 재료 실험을 통해 효과적으로 구현되는데, 의사(pseudo) 디지털 이미지로서의 정희민의 회화는 관람자들이 그림에 가까이 다가가 표면을 바라보도록 한다. 지근거리에서 발견할 수 있는 회화적 흔적만이 무차별한 데이터의 나열과 차별화되기 때문이다. 여성의 얼굴, 주전자, 사과, 레몬, 도너츠, 곰인형과 키티 캐릭터, 몇 차례 반복되어 나타나는 개 도상의 파편적인 조합이 도대체 무슨 내용을 지시한다는 말인가. 3D 디지털 웨어하우스라는 방대한 이미지 저장소에서 적당히 대상을 고르고 배열해 캔버스에 정교하고 정성스럽게 옮긴 결과물은 가끔 지배적인 도상과 제목 탓에 해석에 이끌리게 하지만 대체로 추상에 이르러 결국 회화적 물성을 더욱 더 의식하게 만든다. 그러나 빠른 붓질과 두꺼운 마티에르로 뜨거운 파토스를 분출하는 표현주의 회화와 대조적으로, 세밀하게 분할하여 통제한 그림은 감정을 억제한 상태에서 물성을 감각하도록 한다. 아날로그(테오도르)는 디지털(사만사)를 동경하여 모방의 불가능성을 알면서도 우선 감성적으로 닮으려 하는 게 아닐까. 혹은 그 반대이거나. 작가는 전체적으로 매우 엷은 화면 위에 겔미디엄 등으로 물감이 흐른 흔적을 표시한다. 단지 물감이 흐르도록 하는 게 아니라 흐름의 크기와 방향조차 치밀하게 구상한다. 건조한 데이터에 어울리는 회화적 눈물의 균형점을 찾으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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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민의 그림에는 종종 역광이 있다. 캔버스 후면에 조명을 설치하여 사각형 프레임 밖으로 새어나오는 빛을 보게 만든다. 역광은 그림을 멀리서 보도록 한다. 모니터의 빛을 바라볼 때 표면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눈이 시려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데, 이렇게 빛은 우선 눈을 표면에서 떨어지게 한다. 《스노우 스크린》(2017)전에서 영상 작업들과 한 공간에 놓인 정희민의 회화를 마치 영상을 보듯 감상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빛 그림자’였다. 빛 그림자는 캔버스의 프레임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적당히 어두운 공간에서 빛에 둘러싸인 회화는 더욱 평평해 보인다. 미묘한 붓질의 흔들림과 안료의 번짐이 가려지면 회화는 디지털 렌더링 이미지를 크게 확대하는 수단이 되어 쓸데없이 과도한 정성스러움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역광이 있어도 회화의 크기가 커지면 다시 관람자를 그림에 다가서게 한다. 그림의 한 가운데 역광이 닿지 않는 지점에 서서 눈이 익숙해지면 다시 회화적 흔적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다가섬과 물러남의 변증법은 이렇게 디지털과 회화의 변증법이 된다.







Chung Heemin’s Painting: Crying Data

Kim Jung-hyun / Art critic, Independent cura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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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s begin this text with a film about a love story. In 1987, the film director Wim Wenders, in early thirties, released what would become his absolute masterpiece Wings of Desire . As the Italian literati once recited the opening lines of Dante’s Inferno : “Midway upon the journey of our life I found myself within a forest dark, For the straightforward pathway had been lost ,” the cinephiles who saw Wenders’ film recited “When the child was a child” from Peter Handke’s poem “Song of Childhood”, narrated by Bruno Ganz (angel Damiel) at the opening of the film. The reason why I brought up an old film is because the expression of ‘love’ came up out of the blue in my conversation with Chung Heemin. Later, I found out that the artist had used the word ‘love’ in the titles of her previous works. For example, Chung’ s work Erase Everything but Love (2018) shown in her exhibition Eve (2018) reminded a critic of the ‘Like’ icon in SNS1. In the word ‘love’, spoken by the artist herself before I visited her studio to view her works, there was a strange resonance to the word which put on the brakes on the automatic inclination to categorize the works of a young artist, born in 1987, as a painting of the new generation which responds to the digital environment of this contemporary age. What does she mean, love? While talking about the grounds of the artist’s utterances, whether they’re about personal history, taste or sensibility, Chung told me the story about an angel who tried to become human ‘in order to touch’ those whom they love. I felt immediately persuaded, then again repulsed, by the metaphor of the tactility of love or the sensual love. Let’s explore these ideas through another film about love. Relatively recently, Spike Jonze’ film Her (2013), released in Korea in 2014, shed a shocking view on a new concept of love between the male character(played by Joaquin Phoenix) and Samantha, an AI operating system. Scarlett Johansson’s voice behind Samantha, imbued a strong persuasive power to this impossible relationship of love. If one had to portray love as something new like painting in the post internet age, an example of such icon would be Samantha, and a romantic relationship of love with data, an immaterial and non-tactile AI operation system. In Wings
of Desire , the angel occasionally enters the time of human like the main character, and escape its omnipresent presence. Damiel ‘leaves’ and enters the time of Marion, his love. On the other hand, Theodore in Her falls in love with Samantha right away, but then distances himself from her when he recognizes her ubiquitousness. She, or data, is ‘lost’. Old romantic illusions are more enticing than genre art of love of new age, probably not (only) because it’s a happy ending (beginning of love) as opposed to a sad ending (farewell). Why would Chung be more interested in romantic love, as captured in a film released in the year of her birth, rather than producing new form of the ‘timely’ post digital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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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g’s statement that she often asks herself what she wants to touch sounds schizophrenic. And this conflict is amplified due to the fact that she still deals with the painting medium, one that is still manual, rather than working
with mechanical medium of reproduction like photography or film. Furthermore, the traditional image creator’s desire to ‘imbue reality to the imaginary’ is strangely distorted. They desire for the painting, an imagination, to be more imaginary rather than mimic the real. They aspire to mimic the imaginary as something which has newly
emerged as a subject of imitation, rather than something as an idea or that which belongs to an inferior value system. Chung converts the ‘digital image’ into an ‘analogue image’, rendered through the 3D modeling program
SketchUp. This deviates from the traditional image production structure of the world and reproduction. Imitation was regarded as a gesture which immediately turns the relationship of original and the reproduction into a hierarchical one, and desires the world and objects. However, in the age of changes where 3D modeling program goes beyond
the instrumental means of regulating human cognition, objects seem to construct their own self-contained world as opposed to copying, substituting and supplementing reality. By transferring the worlds created in such way onto her canvas, is Chung trying to bring the heterogeneous elements into human time to make it touchable? Is the digital image inside the 3D modeling program hoping to be transferred onto the canvas to become an existence that can be felt and loved, just like how the angel Damiel yearns for humans? Such non-human perspective seems to overtly
romanticize the medium conversion of the image. One can sense the desires to quickly solv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digital and painting. Switching the point of view, perhaps if what the artist desires to touch is the existence inside the 3D modeling program like Samantha who roams about immortally, perhaps what the gesture of painterly imitation exposes is the impossibility of love and repression of desires. Chung paints in an extremely controlled manner. She demonstrates a compulsive sense of patience as if to prevent any slightest chance of coincidence through strict masking, filling out the canvas as if clicking each pixel one by one in creating her image. The temporarily broken image on the monitor is put back together like puzzle pieces through a long period of time when it’s being reproduced on the canvas. The visual effect of digital images is efficiently realized through experimentations with various material. Here, Chung’s paintings as pseudo-digital images prompt the viewers to come close to the works and look at their surface, because traces of painting, distinct from the indiscriminate lines of data, can only be discovered within close proximity to the painting. Exactly what is the content indicated by the fragmentary assemblies of women’s faces, kettles, apples, lemons, donuts, teddy bears, Hello Kitty characters, and the image of the dog repeatedly occurring in the work? Chung chooses appropriate subjects from an extensive image storage called 3D Digital Warehouse, then transfers them onto the canvas in an elaborate and devoted manner. While the dominating images and titles can occasionally lead the viewer to their interpretation, they usually arrive at a point of abstraction, making the viewer to become more conscious of the painterly property of matter. However, in contrast to Expressionist paintings that erupt with hot pathos, with their brisk brush strokes and thick sense of materiality, the elaborated divided and controlled painting allows us to feel the matter while suppressing emotions. Perhaps analogue(Theodore) yearns for the digital (Samantha) and thus first tries to mimic it emotionally,
even though it’s aware of the impossibility of imitation. Or the other way around. The artist expresses traces of paint flowing through gel medium, etc. on a generally very thin surface. Not only does the artist allow the paint to simply flow, but also conceptualizes elaborately on the scale and direction of the flow, as if to find the point of balance in the painterly way of crying that suits the dry 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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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g’s paintings are often equipped with a backlight, so that light leaks out the rectangular frame of the canvas. Backlight makes the viewer look at the painting from a distance. Just as the light from the monitor tires the eye and thus a certain distance is required between the eye and the monitor, light in Chung’s work first and foremost puts
a distance between the eye and the work. In the exhibition  Snow Screen (2017, Archive Bomm), Chung’s paintings were installed in the same space with video works, and one of the elements that make Chung’s paintings in the
exhibition be read as if one were looking at a video work is this ‘light shadow’. Light shadows make the frame of the canvas more prominent. In moderately dark spaces, the painting enclosed in light looks more flat. If the subtle traces of the brush strokes and the spreading of the color pigments become obscured, the painting would only become a method of blowing up a digitally-rendered image and remain a needlessly excessive devotion. However, even if there is a back light, the viewer draws closer to the painting when the painting grows in size. If the eye rests on the middle of the painting where the backlight cannot reach, the painterly traces become evident again. And thus the dialectics of drawing near and growing distant becomes the dialectics of digital and painting.






NAVY: 길고 슬픈 블루(스)

이현 



“그럼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줄게. 그건 정말 길고 슬픈 이야기(tale)야!” 생쥐는 앨리스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길고 긴 꼬리(tail)네.” 앨리스는 생쥐의 꼬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왜 꼬리가 슬프다는 거야?”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의 고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1865)를 둘러싼 세계는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하다.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동물들, 별안간 커지거나 작아지는 신체, 법체계가 무너진 재판 과정…. 앨리스가 토끼 굴에 들어가면서 겪는 일련의 기묘한 사건을 그리는 이 작품은 전형적인 회귀식 모험 소설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동화 장르임에도 도덕적, 교훈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독특한 문학적 위상을 차지한다. 이상한 나라의 무질서한 판타지 세상은 19세기 급속한 산업화와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이행하던 영국 사회상을 일부 반영해 풍자하고, 현실 세계관과 대립하면서 현대 철학 사조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특히 캐럴은 말장난, 패러디, 어크로스틱(Acrostic) 등을 활용해 기존 언어 규칙을 의도적으로 비틀고 파괴하면서 일종의 ‘언어게임’을 독자에게 제안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sense)를 무의미(nonsense)로 전복하는 과정을 통해 독자는 현실 세계의 불합리성을 되새기고, 주인공 앨리스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 서두의 인용문에서 ‘길고 슬픈 이야기(tale)’라는 논리적인 서사가 한순간 ‘생쥐 꼬리(tail)’라는 이미지로 전환됐듯이, 예측 가능한 구조의 단절은 기존의 체제를 탈주하는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



정희민(Heemin Chung)은 오늘날 보편화된 디지털 환경에서 (재)생산되는 이미지와 이를 지각하는 방식을 회화언어로 탐구한다. 그는 첫 개인전 <어제의 파랑(Yesterday’s Blues)>(2016)에서 외형적 유사성을 띠는 풍경화와 풍경 이미지를 수집하고, 이를 에러가 발생한 컴퓨터 화면처럼 변형한 회화를 선보였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일종의 관습 속에서 특정한 힘을 얻듯이, 풍경 역시 회화의 주된 소재로서 상징적인 권력을 취득해 왔다. 작가는 이러한 풍경을 중첩, 왜곡하면서 기존의 이미지가 반복해 온 전형적인 구도를 해체하는데, 이 과정에서 구체적인 형상은 증발하고 하늘빛을 이루던 색채만 잔여물처럼 남게 된다. 즉 풍경(화)에 얽힌 유장한 이야기는 낱장의 푸르뎅뎅한 이미지로 대치되고, 장르의 질서가 안정되게 유지되어 온 시절은 ‘어제’의 시간으로 회고된다. 이후 두 번째 개인전 <UTC-7:00 Jun 오후 3시의 테이블>(2018)에서 작가는 토끼 굴에 빠진 앨리스처럼 프레임 안으로 좀 더 길을 헤매고 들어간다. 그는 3D 모델링 프로그램을 작업에 도입하면서 ‘오후 3시의 테이블’이라는 가상의 시공간을 설정하고 다양한 정물이 비치된 장면을 캡처하듯 고스란히 떠냈다. 특정한 장소를 지시하는 듯한 제목은 캔버스를 벗어난 현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과잉 확대된 낯선 시점, 중력과 물성이 소멸한 매끈한 표면,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정물은 이 가상공간의 질서를 탐색하려는 시도를 연거푸 실패하게 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정체성은 일관된 수학적, 지리적 질서로 이루어져 계산 가능하지만, 정희민의 ‘이상한 나라’에서 현실의 규칙은 와해되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신체 사이즈가 재차 변하는 앨리스처럼, 마우스 휠의 움직임에 따라 확대/축소되는 시점으로 관찰되는 정물들은, 허깨비 같은 덩어리로 다가올 뿐이다.



정희민은 회화적 표현을 최대한 자제하고 디지털 이미지의 속성이 여실히 드러나도록 기계처럼 캔버스에 복제한다. 그림의 개별 대상이 갖는 상징을 작품 해석을 위한 근거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만든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무의미한 상황 자체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는 이 이상한 나라에서 현실을 단단하게 유지하는 약속들을 어기고 유희하면서 스스로의 정체를 고민해 나간다. 풍경화와 정물화로 대표되는 회화 장르의 상징성은 해체되고, 중첩된 레이어는 환영을 제거하며, 그림 곳곳의 얼룩진 미디엄은 그림의 세계와 그것을 보는 관객 사이의 거리감을 조성하는 제스처로서 작동한다.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의 혼란 속에서 길을 잃었지만 덕분에 자신이 누구인지 고민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제의 파랑’은 더 이상 여기 없지만, 정희민은 오늘날 회화와 화가의 정체성이라는 질문을 안고 파랑보다 짙은 감색(Navy Blue)의 망망대해에서 모험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NAVY: The Long and Sad Blue(s)

/ Yi Hyun



“Mine is a long and a sad tale!” said the Mouse, turning to Alice, and sighing. “It is a long tail, certainly,” said Alice, looking down with wonder at the Mouse’s tail; “but why do you call it sad?”



The world in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a classic written by the English writer, Lewis Carroll, is filled with absurdity and contradiction: the animals that talk and act like humans, the transforming body rapidly turning big or small, and the trial without a system of law. The story, depicting a series of mysterious events that happen as Alice goes inside the rabbit hole, follows the typical convention of adventure novels that holds a reflective theme. However, its literary originality comes from the character that does not emphasize ethical or moral lessons, which play an important role in other fairytale stories that have been created for kids. The chaotic fantasy world of the Wonderland lampooned the aspects of the English society in the 19th century, the society that was rapidly transitioning towards industrialization and capitalism. The world inside it conflicted with the down-to-earth view of the world, and this quality even affected the contemporary philosophy of the time. Particularly, Carroll intentionally twisted and destroyed the existed rule system of English with puns, parodies, and acrostics. By doing so, he proposed a kind of ‘language game’ to the readers. Through the process that subverts the sense of the language to nonsense, the readers can ruminate the irrationality of the real world, and the main character, Alice, establishes her identity in the story.  As the quoted dialogue of the mouse and Alice at the beginning of this writing turns over the logical narrative of ‘a long and a sad tale’ to the image of ‘the Mouse’s tail,’ the rupture of the common structure creates the unexpected new meaning from the existing system.



With a painting language, Heemin Chung explores (re)produced images in the widespread digital environments and the way of perceiving them. In her first solo exhibition, Yesterday’s Blues (2016), she showed paintings that were made to be looking like the computer screen with errors in it. For those paintings, she first collected existing landscape paintings and landscape images that looked similar and transformed them into the paintings. As the language we use is empowered through conventions, the landscape has been empowered its symbolic authority by being one of the major subject matters in painting. Chung deconstructs the repeated typical composition of the existing images by overlaying and distorting the landscapes. In this process, specific shapes evaporate and only the sky blue color is left as the residue of them. In other words, the long story about landscape (paintings) is substituted with a single sheet of blueish image, and the days, when the order among genres was maintained, become ‘yesterday’ that are to be recalled. In her second solo exhibition, UTC-7:00 JUN 3PM On the Table (2018), Chung wandered a little more and went into the frame like Alice who fell in the rabbit hole. She introduced 3D modeling software to her work, set the virtual time-space called ‘3PM On the Table,’ and scooped up the scenes of the various still objects as if she captured them. The title, which seems to imply a certain place, does not exist anywhere in the real world. Besides, the strange viewpoint that is excessively enlarged, the smooth surface that eliminates gravity and property, and the still objects of unknown sizes make us fail to explore the law in this virtual space again and again. Unlike the identities of the world we live in, which can be calculated since they have consisted of the coherent mathematical and geographical orders, the real-world rules are crumbled and not valid anymore in Chung’s ‘wonderland.’ As Alice’s body size transformed repeatedly, her still objects, observed with the zoomed-in/-out viewpoint that follows the movement of the mouse wheel, come closer as the chunk of hallucination.



Chung minimizes painterly expressions and reproduces like a machinery in order to expose the quality of digital images. She does not utilize any symbols of the individual object in her paintings as the basis for interpreting her work but uses the meaningless situation itself to authorize the world she produced. In this strange land, she keeps on pondering her own identity whilst breaking the promises that firmly maintains the real world and plays with them. The symbolism in painting genre that used to be represented in landscape and still life paintings are deconstructed. The overlaid layers remove illusions, and the spotted medium that lies here and there in the painting operates as the gesture which creates the sense of distance between the world inside the painting and its viewers. Although Alice was lost in the confusion inside the Wonderland, she was able to ponder about who she was. Likewise, Chung will continue her adventure in the open sea of Navy Blue that is darker than blue, with the question about the identities of painting and painters of today.






회화의 평면성에 대한 새로운 탐구

심소미 / 독립 큐레이터


동시대 미술에서 ‘회화가 죽었다’는 논의도 있었지만, 결국에 회화는 형식적 토대를 유지하는 가운데 그 존속을 여느 매체보다도 강하게 이어가고 있다. 정희민의 작업은 오늘날의 회화성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흥미로운 점은 작가가 ‘무엇을 그릴지’를 고민하기에 앞서 회화의 기본적인 틀, 형식적인 평면성부터 접근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엣지’라 칭해온 전통적인 회화의 평면성을 오늘날의 감각으로, 동시대적 지각방식으로 통해 해석해나가는 지점이 특히 흥미롭다. 이는 전시의 전체적인 구성과도 관련된다. 이미지는 전체적으로 공간에 마치 설치 작품마냥 다뤄진다. 벽면과 공간 사이에 자리한 이미지들은 벽면에 걸쳐지기도 하고, 벽에서 공간으로 흘러내리기도 하고, 천장에 매달려 공간을 부유하기도 한다. 공간에 전체적으로 강약을 조절하며 짜임새 있게 배치된 작업은 공간 전체를 컴포지션한다. 전시가 공간적으로 잘 구성된 연극 같은 인상이라, 이 지점에서 필자는 정희민이 회화를 구현하는 형식적 특징부터 질문을 던져본다. 오늘날 회화의 연극적이고 설치적 구성은 과연 회화의 형식적인 확장인가? 이 지점에서 정희민의 작업은 회화의 설치적 효과, 연극적 공간 구성을 통해 형식적 확장을 노리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는 철저하게 회화의 평면성에 대한 연구로부터 공간으로 나아간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이미지를 인식하는 지각방식과도 연관된다. 컴퓨터 스크린과 미디어 화면을 통해 접하는 이미지들은 물성이 없는 이미지, 그 자체로서 표면에 존재한다. 인터넷의 여러 개 창처럼, 하나의 표면에 동시다발적으로 다른 세계가 공간을 점유하기도 한다. 회화의 물성에 비하면 이미지의 등장과 지각의 방식은 가볍고, 유연하며, 신속하다. 정희민의 회화에는 이러한 시대적 지각방식이 형식적, 내용적인 구성 모두에 고려된다. 평면으로부터 공간으로 나온 그의 작업은 사실 철저하게 표면화된 오늘날의 이미지, 지각의 과정을 고심한 결과이다. 공간에 밀착되고, 허공을 부유하는 이미지들은 철저하게 ‘평평해진’ 회화라 할 수 있다. 이는 전통적인 회화의 평면성, 지금의 시점에서 고전이 된 지각방식으로부터 벗어나 동시대의 시지각 현상으로서 회화를 접근하고자 한 것이다. 표면의 뒤를 보지 않고서, 그리고 표면의 모서리를 다루지 않고서 어떻게 그 세계의 차원을 알 수 있는가? 이에 대해 필자는 정희민의 작업으로 대답하고자 한다. 차원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오늘날 정희민의 작업은 시각구조에서 가장 말초적인 표면에서의 감각을 평면적인 레이어로, 동시다발적인 차원으로서 드러냄으로써 여전히 우리에게 회화의 평면성이 유효함을 밝힌다. 그리고 이보다 더 적극적으로 작가의 작업은 평면화 되어 가는 공간적/시대적 차원을 새로운 회화의 평면적 조건으로 제안한다.